회사 조직개편 이후 현실과 동떨어진 KPI, 끝없이 반복되는 링기쇼, 그리고 상무의 압박까지. 점점 무너져가는 일본 회사 생활의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야기.
캠핑 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주말이면 대부분 캠핑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동지방 일대 유명하다는 캠핑장들은 공간이 허락하는 한 한 번씩은 가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나서서 셰어카에 짐을 싣고 1~2시간 걸려 캠핑장에 도착. 캠핑 사이드에 텐트를 치고 이어 불을 지피고 고기와 함께 맥주 한잔, 그리고 낮잠, 밤에는 불멍.
아침에 일어나 향긋한 드립 커피 한잔 내려 캠핑장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힐링을 즐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텐트를 걷는 동안 땀이 송골송골. 돌아가는 길에 즐기는 노천 온천은 캠핑의 진짜 묘미다. 장소에 따라서는 후지산이 보이기도 한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다시 일상이 있는 도쿄로.
주말을 이렇게라도 보내지 않으면 도저히 평일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재택근무가 답답해서만은 아니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포지티브 한 방법이 캠핑이었던 샘이다.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상과 현실에는 큰 괴리가 있다. 이번 직장생활은 그러지 않기를 바랬지만.

일본회사가 답답해진 이유
입사 이후로 거의 매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 인원수에 큰 변동은 없었다. 대부분 중도 퇴사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속한 EC(온라인 쇼핑몰) 팀은 유동이 없었다. 팀원들끼리 똘똘 뭉치며 매출 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팀워크도 제법 맞았다.
그러나 새로운 반기(半期)가 시작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발표되었다. 영업부에 속해 있던 우리 팀은 통째로 경영전략팀 산하로 이동했다. 동시에 담당 임원도 바뀌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상무이사 역할을 하는 사토(가명). 그와 영 궁합이 맞지 않았다. 하필이면 얼마 뒤, 입사 선배이자 가장 의지되었던 멤버 한 명도 퇴사를 했다.
새로 하달된 목표(KPI)는 현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로 채워졌다. 특히 매출 목표가 비현실적이었다. 120%~150% 성장이라면 그나마 납득을 하겠다. 무려 200%에 가까웠다. 반기 안에 그 정도 드라마틱한 성장을 이루어내려면 충분한 이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는 코로나로 인해 부진했던 오프라인 매장을 다수 철수하고 온라인으로 리소스를 집중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팀 인력 확충이나 마케팅 예산 증액이 아닌 고문, 컨설팅 의뢰였다. 이들에게 매달 들어가는 비용은 못해도 월 수백만 엔은 되었을 터. 그래서 목표치가 높아졌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일본 대형 마케팅 회사, 대기업 온라인 쇼핑몰 경력자들로 구성된 이들에게 보고 배울 점은 많았다. 매주 미팅 하는 시간을 가졌고 매출 개선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덕분에 기존 방식에 대한 재점검도 하고 놓치고 있던 부분들도 바라볼 수 있었다. 분명 도움은 많이 되었다. 다만 매출 자체는 그다지 변동이 없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갈수록 초조해졌다. 매주 금요일마다 사토에게 주간 KPI성과를 보고를 해야했다. 달성률은 100%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에게 이런저런 애로 사항을 이야기한들 ‘그게 왜 어렵냐’는 반응이 대부분. 마케팅 예산을 제안해도 ‘링기쇼(稟議書)’ 올리라는 말 뿐이었다. 일이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이 링기쇼 때문이었다.

보고를 위한 보고의 늪
링기쇼는 우리말로 하자면 품의서다. 링기쇼는 6하원칙에 입각해서 작성해야 하며 기대 효과가 포함되어야 한다. 취지 자체는 좋다. 그런데 단 돈 100엔을 쓰더라도 무조건 링기쇼가 필요했다. 다이소에서 100엔짜리 하나 사는데 어떤 가시적 성과가 기대될지 고민하는 자체가 일이 되었다.
거기다 링기쇼 결재단계가 제법 복잡했다. 팀원들과 회의 후에 품의를 올리면 팀 임원인 사토에게 넘어간다. 사토가 확인하면 재무/회계 담당 임원에게, 그다음은 부사장, 그다음은 사장까지 넘어가는 식이다. 이 중 한 사람이라도 반려한다면 승인받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린다. 거기다 사장, 부사장(부부)이 결재도장을 찍는 건 일주일에 단 한 번뿐.

링기쇼만 발목을 잡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한 번은 계약이 발목을 잡았다. 자사몰 리뉴얼을 위해 웹디자인 회사와 용역 계약을 맺을 일이 있었다. 계약 내용 중 회사 입장에서 다소 불리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며 법무 담당이 태클을 걸어왔다. 오랫동안 실무를 해왔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었다.
법무 담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정말 올곧은 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자신은 이 내용을 사장님에게 보고할 수 없다고 했다. 사토에게도 이런 사정을 보고 했지만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뿐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정은 계속 딜레이 되었고 법무 담당과는 수차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더 기가 막혔던 건 예상 발주량 잡는 일이었다. 어느 날 사토가 매출 목표 달성에 필요한 브랜드별 발주량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한 끝에 간신히 보고서를 제출했다. 어느 정도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로부터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
그래, 내가 포인트를 놓쳤을 수 있어. 그가 지적한 점들을 보완해서 다시 내용을 다듬었다.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매번 아니야(違う)를 연발했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나도 이 이상 낼 수 있는 결과가 없다고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어떤 건지 분명히 말해달라고 말했다.
“이거 내가 만든 거니까 참고해서 다시 만들어”
몇 주를 씨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뒤늦게서야 자신이 쓰는 양식을 공유해 주었다. 내가 만든 것과 본질은 비슷했지만 보는 방식이 달랐다. 표로 보는 게 힘드니 그래프로 만들어 달라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훈련시키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건지 본심을 알 수 없었다.
어느덧 다시 반기를 마감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연말을 앞두고 KPI 최종 평가 결과가 나왔다. 달성률 90%. 목표 달성 미달로 상여 삭감. 지난번에는 성과 달성에도 승진 외에 급여 동결로 한 차례 빈정이 상했었는데 상여마저 줄었다. 임원 승진은커녕 이러다가 급여마저 줄어드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