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5일,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온 20도에 이르는 포근한 가을 날씨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인천공향을 향했다. 지마켓에서 구매한 바퀴 4개 달린 커다란 이민가방을 끌고 도쿄행 티켓을 발권 받았다. 마치 여름인 것 처럼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한가득 맺혔다.

이번이 첫 일본행은 아니었다. 오사카와 돗토리현을 각각 두 차례씩 가보았다. 다들 여행이 목적이었기에 일주일이내 짧은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장정 6개월에 거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이 아닌, 일본 해외인턴을 위해 떠나는 길이었다.

인천공항 전광판.
도쿄로 떠나는 날 아침, 인천공항 전광판.

난데 없는 일본어 트라우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일본학 전공을 했다. 졸업과 취업을 위해 일본어 자격증도 따두었다. 마지막 성적은 JLPT N1과 JPT800점대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년정도 취업 준비를 거쳐 2013년 3월, 모 상장사 해외영업직으로 취직했다. 구직난이 한참이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꽤나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외영업팀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였다. 영어가 싫어서 그나마 배우기 쉽다는 일본어를 선택했었다. 회사면접때도 일본어 평가만 있었지 영어(점수)는 서류평가용 정도로 지나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영어를 써본적이 없는데 느닷없이 영어로 바이어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아야 하는 상황에 심적 부담이 커져만 갔다.

입사 두달차가 되어가던 어느날, 때마침 회사에 일본 바이어가 찾아왔다. 사수는 나에게 동석을 요청했다. 회의실에서 일본 바이어와 인사를 나누고는 보통의 신입들처럼 노트에 미팅 내용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어는 학교에서도 중상위권 정도 실력이었고 자신있는 언어였다.

그런데 노트에 도저히 필기를 해 나갈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멍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들리는 단어들만 히라가나로 휘갈겨 적었다. 나중에 복기해 볼 요량이었다. 어느덧 미팅이 끝났고 사무실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뒤 사수의 호출이 있었다.

“오늘 미팅 내용이 뭐 였는지 말해봐.”
“…”

단 한마디도 답변 할 수 없었다. 업계 용어가 낯설어서 놓친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본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장시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도, 드라마도, 시험도 아닌 현실에서의 일본어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첫 직장에서. 긴장으로 가득찼던 시간들
첫 직장에서. 긴장으로 가득찼던 시간들

일본어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렸고 자존심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엄했던 사수는 내가 못미더워졌는지 더욱더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애정어린 격려도 어느샌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 욕으로 바뀌었다. 실수는 점점 늘어났고 퇴근시간 밤 9시, 10시는 기본. 일요일 오후부터는 지독한 월요일병이 시작되었다.

“형민아, 나 일 그만두고 일본 워킹홀리데이 가려고.”

여느날처럼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중 대학때 선배로부터 뜻밖의 카톡을 받았다. 회사를 잘 다니고 있던 형의 느닷없는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홀) 선언. 그것도 바로 다음달이었다. 그 말을 듣고 무언가에 홀린 듯, 더 늦기 전에 일본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길로 바로 일본 가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일본 해외인턴의 기회

맨 처음 일본 워홀을 신청했다. 워홀은 일본에서 1년 동안 자유롭게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비자 프로그램이다. 회사일로 정신이 없어 직접 신청하는 대신 대행사를 통해 맡겼다. 비용은 대략 20만원 내외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어 자격증에 관련계열 전공이니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워홀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에 생활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해외인턴, 신문장학생, 호텔취업, IT연계취업 등도 찾아보았다. 걔 중 가장 현실감 있던 것은 해외인턴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해외취업을 장려하던 때로 다양한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그 중 (당시)중소기업진흥공단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일본 현지 한인기업과 1:1 매칭을 통해 6개월간 인턴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르바이트보다는 회사 생활하는 것이 향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입사 3개월 수습기간을 마침과 동시에 회사를 나왔다. 내 나이 27살,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퇴사와 동시에 해외인턴 준비를 시작했다. 운이 좋게 서류전형과 면접전형은 쉽게 통과했다. 이후 중소기업진흥공단 안산연수원에서 한달간 합숙교육을 받으며 일본의 모 한인기업과 매칭이 되었고 일본행을 확정지었다.

다만 한가지 변수가 생겼다. 잠시 잊고 지냈던 일본 워킹홀리데이에서 비자 발급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관련 전공에 일본어 점수까지,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 떨어진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선배형도 얼마전에 받았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

공단, 그리고 회사 담당자와 상담 후 관광비자(무비자)로 들어가기로 했다. 일본 관광비자로 1회 입국시 90일 이하의 단기 체류가 가능하며 연간 최대 160일까지 머물 수 있다. 단, 현지 취업이나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하다. 물론 무급 활동은 가능하다. 이번 인턴십의 경우 공단에서 지원해주는 생활지원금 외에 별도로 급여가 없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쉐어하우스를 계약하다

합숙교육에서 돌아온 후 본격적인 일본행을 준비했다. 맨 먼저 도쿄 나리타행 티켓을 예약했다. 일본과 연을 맺은지 만 10년만에 첫 도쿄행이라 설레임이 가득했다.

다음으로는 인턴 기간동안 지낼 숙소가 필요했다. 아쉽게도 현지 기업에서는 별도로 숙소가 제공되지 않았다. 일본 교환학생을 다녀온 선후배들의 경우 레오팔레스를 많이 이용했었다. 보증금 없이 단기 거주 가능하고 가구와 가전이 포함된 원룸이다. 서울에 있는 레오팔레스 사무소에서 상담을 받았지만 월 백만원대에 이르는 금액이어서 부담감이 컸다.

대안으로 ‘쉐어하우스’를 찾아 보았다. 여러 사람이 한 집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형태로 도쿄내에 다양한 쉐어하우스가 존재했다. 도미토리 타입, 원룸 타입, 여성전용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기에 원룸형을 중심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출근하게 될 회사가 오다이바(お台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간 이내로 출퇴근 가능한 곳 위주로 찾아보았다. 회사에서 추천했던 장소는 몬젠나카초(門前仲町). 하지만 금액대가 있어 그보다 저렴한 곳을 찾아보다가 히츠지 부동산에서 쉐어라 스미요시(シェアラ住吉)라는 곳을 발견했다.

다행히 공실이 있는 것 같았고 당장 메일 주소로 입주 가능여부 문의를 넣었다. 얼마뒤 집 주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외국인도 계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위치도 버스 정류장 및 지하철역에서 도보 1분 이내에 있어 출퇴근에 용이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쉐어하우스 내부 사진
인터넷에서 찾아본 쉐어하우스 내부 사진(출처: jp-guesthouse.com)

계약전 면접이 필요하다고 하여 스카이프를 통해 10여분 가량 화상면접을 진행했다. 일본에 오고자 하는 이유, 임대료나 쉐어하우스 생활에 대한 부분, 입국 일정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면접을 끝마치고 메일로 계약 서류를 보내왔다. 비용은 5만엔대로 다른 지역보다 1만엔 가량 저렴하기도 했다. 바로 계약 을 진행했다.

다음 동유모 카페에서 일본 임대폰 렌탈과 생활 정보등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본행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느닷없이 시작된 일본어 트라우마로부터 일본행을 결정짓기까지 100일의 시간이 흘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던 순간. 하지만 이때까지도 내가 일본에서 10년 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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