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직 (전직) 후기. 5천 개가 넘는 재고 관리와 일본어 소통의 장벽 속에서 고충을 겪었던 일본 직장생활. 일본에서 겪은 혹독한 현실을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일본 이직 후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 밝았다. 지난 5년간 몸 담았던 무역 컨설팅이 아닌 유통업이다. 분야도 새롭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 차기 사장후보이기도 하니까.
일본 이직 후 영업지원팀장으로 첫걸음
히가시 신주쿠에 위치한 A유통사. 네모 직각 반듯한 9층 규모의 일본 스타일 빌딩. 이곳의 2층과 3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영업팀은 그중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에 ‘팀장 김형민’의 데스크가 있다. 모니터도 듀얼 모니터에 PC도 최신형이다. 성과만 내면 된다.

영업지원팀은 업무는 간단히 말해 발주처리 하는 일이다. 발주서대로 창고에 출하지시를 하고 거래처에 납기일정을 안내한다. 창고에 입고되는 재고 정보를 갱신하고 월말에는 견적서를 작성한다. 사내에 공유할 재고현황표를 매일 업데이트한다. 심플하게 보자면 업무는 이게 전부다.
퇴사를 앞두고 있는 전임 팀장님에게서 일을 배웠다. 결원에 의한 충원이라는 사실을 입사 후에야 알았다. 든든한 사수 같은 존재가 곧 없어진다는 점은 불안했지만 걱정 없었다. 난 잘 해낼 수 있으니까. 회사 기간 시스템에서부터 엑셀 시트 작성 시 주의사항 등 세부적인 것들을 한 달여에 걸쳐 인수인계받았다.
A유통사에서 관리하는 상품(SKU) 수가 5,000여 가지를 넘었다. 4로 시작하는 13자리 바코드 넘버(Jan code)가 가득한 재고현황표. 취급하는 브랜드와 디자인별 컬러가 다양했다. 이들 상품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재고관리표에는 각 상품별 재고수와 입출고수 현황을 담고 있었다. 영업지원팀 팀장으로서 이 시트를 통달하는 게 가장 큰 미션이었다.
입사 후 한 달간은 전임자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이 무렵 즈음 사장님에게 인수인계 진행상태를 보고하는 자리가 있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금세 익숙해질 것 같다고 했다. 흡족한 표정을 짓던 사장님은 한 가지 미션을 준다.
“회사에 바꿀 것이 있다면 바꿔보세요. 외부인의 시각으로”
현재 회사에 있는 사람들은 장기 근속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그와 달리 나는, 다른 업계에서 들어온 중고 신입이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찾아서 개선하는 일. 영업팀장, 아니 차기 사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퇴근시간 밤 11시
일본 이직 두 달 차부터는 전임자 도움 없이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옆에는 비슷한 시점에 입사한 일본인 직원,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와세다 유학생이 있었다. 이들과 2인 3각으로 영업지원팀 업무를 헤쳐 나갔다. 배우면서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막상 재고표를 만드는 일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기간 시스템에서 상품과 재고 정보를 다운로드하여 각 SKU별로 매칭시키는 일. VLOOKUP 함수를 이용해 최신화한다. 상품수가 적으면 큰 문제가 없을 텐데 5천여 개에 이르다 보니 산발적으로 미스매칭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표를 기준으로 납기를 약속한 영업직원도, 상품 발주를 넣은 사장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시트를 만드는 일이 일과 시작이었다. 몇 차례 걸쳐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처리할 데이터가 많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우스 포인트를 보는 일이 많았다. 또 실수할지 몰라 세심하게 체크했다. 전임자는 20~30분에 끝낼 일을 2시간 가까이 붙들고 있었다. 사내전화와 메신저로 연신 재고관리표 업데이트 언제 되는지 확인 연락이 온다. 그들도 중요 업무가 스톱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종의 악수를 두게 된다. ‘재고관리표 작성’ 자체를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사장님 주문했던 ‘바꿀 것’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엑셀 VBA 코드부터 에어테이블, 구글 스프레드 시트 활용 등 여러 가지 대안책을 연구했다. 심지어 기간 시스템 대체 후보도 찾아 나섰다.
어찌어찌 엑셀 복합 함수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 시트 작성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안을 찾느라 시간을 대부분 허비한 탓에 업무는 점점 쌓여만 갔다. 오후 6시가 되면 타임카드를 찍고 퇴근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빨리 가야 밤 9시. 전임자가 퇴사하고 나서는 이마저도 더 늦어졌다. 귀가시간이 보통 밤 11시였다.

입사 세 달 차 이후로는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가 동시에 몰려왔다. 72kg까지 불어 있었던 몸무게는 64kg까지 급격하게 빠져버렸다. 피로에 식욕까지 없어진 탓이다. 그토록 바랬던 일본 이직이자 일본인들과 함께 일하는 환경을 손에 넣었지만 행복이 금세 식어버렸다.
전화도 직접 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5년 살았어도 대부분 한국어로 소통했기에 일본어 회화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거래처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입고, 납기일정 확인. 그마저도 제대로 답변을 못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서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일도 엉망인데 일본어까지 발목을 잡았다. 이 무렵부터 꿈도 일본어로 꾸기 시작했다. 일본 거래처에 시달리는 꿈이었다. 첩첩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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