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에서도 늘지 않는 일본어
일본어 트라우마가 촉매제가 된 일본행이었다. 대학 때도 교환학생 기회가 있었지만 복수전공을 하기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 양쪽 다 선택할 경우 추가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시험 성적이야 있으니 말하기야 금방 늘 줄 알았다.
인턴으로 일본에서 주어진 시간은 총 6개월. 이 안에 일본어 말문을 터야만 했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사방팔방 일본어가 가득한 일본. 분명 한국 보다는 일본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현지에 있다는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입으로 내뱉은, 커뮤니케이션 일본어는 어째서인지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한 달, 두 달, 세 달.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는데 일본어는 제자리. 그러고 보면 교환학생 다녀온 이들 중에도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속으로 평가절하했었는데… 1년은 언어가 능통해지기에 짧은 시간이었다. 하물며 6개월은.
마음은 조급해졌고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고 싶었다. 평일에는 회사를 오가며 일본 드라마 쉐도잉 연습을 했고 주말에는 서점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 소설책, 마케팅책, 토익책 등 일본어로 적힌 책이라면 뭐든 좋았다. 하루 종일 책을 골라보고 계속 품에 끼고 지냈다.

인풋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 회로도 이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입으로는 어지간해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소리가 올라왔다가 입 앞에서 묵음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일본어 울렁증이 남아 있던 것이다.
사무실 안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인 스텝 한 명뿐.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전화’였다. 사무실 책상에는 전화기가 한대씩 놓여져 있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수화기를 들고 통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구와 통화하느냐 였다.
전화를 통한 일본어 회화 울렁증 극복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일본어 회화도 그렇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게 어려웠다. 이름 정도만 알아듣고 상사에게 전화를 넘기기 일수. 하지만 직접 거는 전화라면 할만해 보였다. 거는 쪽이 주로 용건을 말하니까.
당시 회사에서 비품을 주문할 때 카탈로그에 적힌 상품번호를 주문서에 적어 팩스로 보내고는 했다. 카탈로그에 ‘전화주문도 OK’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래, 전화로 비품 주문을 해보는 거야! 일본어로 말할 기회가 없다면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했다. 전화주문은 그 첫 번째 시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일본어 내레이션을 따라 숫자를 눌러 상담원 연결을 선택했다. 이미 JLPT나 JPT를 공부했기에 전화멘트 정도는 알아듣기 수월했다. 대기음이 1분여간 흘러나왔을까 상담원이 전화를 받았다.
“오뎅와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OO 카스타마 센타데 고자이마스 (전화 감사합니다. OO 고객센터입니다.”
일본에서 직접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긴장되는 상황. 전화를 걸기 전에 어떤 말을 할지 입력해 모니터 화면에 띄어두었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했다. 이 말이 맞는지, 상대가 알아 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혹여라도 주문을 잘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OO 데 고자이마스네. 카시코마리 마시타.(OO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다행히 내 말이 통했는지 상대방은 내가 주문한 내용을 그대로 복창했다. 상품은 내일 도착할 예정이라고. 전화를 끈고 나니 손에 땀이 가득했고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대로 주문한 게 맞을까. 걱정으로 가득 찼던 시간을 지나 다음날, 회사에 비품이 도착했다. 주문한 대로 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날 이후로 일본어에 대한 부담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회사에 걸려오는 전화도 먼저 받고 비품도 나서서 주문했다. 내가 하는 말이 맞든 틀리든 일본어로 대화하고 서로 소통 된다는게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일본어 실력이 한 단계 도약을 하게 되었다.

일본어로 말하는 게 재밌어지니 일본생활도 욕심이 났다. 원래는 인턴을 마치는 대로 영어연수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 아쉬웠다. 일본에 더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회사에서 정사원으로 채용되는 것과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것,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그중 전자를 택했다. 사실, 부장님과 첫 면담 때 회사에서 정사원을 채용할 여력이 되지 않으니 부지런히 취업준비를 하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하지만 ‘인턴’으로만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정사원이야’라는 체면을 걸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회사 일이라면 손, 발 걷어 붙이고 나섰다.
이런 열정이 통했던 것일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50일 정도 남은 시점, 부장님께서 뜻밖의 (아니 내심 원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