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회사에서 팀장으로 승진한 외국인의 성장 이야기. 업무 성과와 리더십 부담 속에서 캠핑을 통해 삶의 균형을 되찾은 경험을 솔직히 기록한 일본 직장생활기.
일본회사 팀장으로 승진하다
일본에서 회사를 옮긴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 재택근무. 매일 같이 마주하는 벽면이 어쩌면 익숙하고 정겹기까지 하다. 테이블 위치를 우측에서 좌측벽면으로 옮겼을 뿐인데도 새로운 곳에 온 것 같다.
회사에서는 매분기마다 성과보고를 한다. 핵심성과지표(KPI)가 설정되어 있다. 개인 달성목표를 수치화하고 달성 정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매출액 목표 100만 일 경우, 100만 엔 달성시 100%로 기록하는 식이다.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숫자로 평가받기는 처음이다.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일’밖에 없던 덕분일까, KPI를 120% 초과 달성했다. 그것도 팀 내에서 유일하게. 목표 달성으로 기대되는 것은 상여금 인상과 승진의 기회. 사장의 입김이나 연공서열이 아닌 실적에 의해 평가를 받는 제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번 분기 승진자를 발표하겠습니다. EC팀 김상, 팀 리더로 승진”
4명뿐인 적은 인원수의 팀이었지만 팀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이전 회사들에서도 팀장급으로 일하긴 했지만 경력자 대우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성과를 내서 당당히 승진했다. 이 추세대로만 간다면 다음 분기 그룹 리더, 그리고 목표로 했던 집행 임원(執行役員)까지 노려 볼 만하다.
또 한 가지 기쁜 사실은 사내 유일 외국인 팀장이라는 점. 직원 구성 비율은 일본인 70%, 중국인 25%로 나머지 5% (나를 포함 2명)가 한국인이다. 승진 당시 집행 임원 한 분이 중국계 한국인이었던걸 제외하면 직급이 주어진 자리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심 대한민국 대표가 된 것 마냥 기뻤다.

한편 팀장이 되고 일도 늘어났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팀원 관리. 그동안은 KPI 관리대상이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직접 KPI를 관리해야 한다. 그들의 KPI달성 여부가 나의 KPI에도 영향을 미친다. 분기 시작 전에 KPI를 설정하고, 매주 금요일 성과달성 척도 체크를 위한 주간보고를 진행했다.
일본에 온 지 수년이 지났지만 일본어가 ‘능숙’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대부분을 한국계 기업에서 일하면서 한국인들과 소통을 해왔다. 일본어는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도구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업무 시작부터 종료까지 오로지 일본어만 써야 했다. 주간 보고를 받는데 일본어가 어색해서는 영 김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업무시간 외에는 일본어 공부에도 매진했다. 예전에 했던 것처럼 일본 드라마 스크립트를 외우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부족한 표현을 보충하기도 했다. 사내 회의 중 일본인들이 쓰는 표현을 캐치해 두었다가 직접 써보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빨리 나오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팀원들도 잘 따라 주었다. 외국인이라고 거부감을 갖거나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서로 호흡이 잘 맞아 업무 분담도 잘 이루어졌고 매출성과도 제법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함께 모여서 맥주 한잔 할 시간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캠핑의 매력에 빠지다
외적으로는 회사에서 성과를 내고 팀장으로 승진하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정작 내적 쓸쓸함은 증폭되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다 보니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지난번 오키나와 여행으로 리프레시되기는 했지만 일시적이다. 일상에 작은 변화가 필요했다.
“나중에 운전하게 되면 캠핑 꼭 가보자!”
와이프가 연애초기때 했던 말이다. 밤에 떠 있는 별이 유난히도 이쁘게 잡힌 잡지 속 글램핑장 사진을 보여주면서. 운전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에서는 차 없이도 웬만한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면 그때 차를 타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오키나와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운전교습까지 받았다. 차는 필요할 때 빌릴 수 있는 수 카셰어링 서비스에 가입했다. 이제 운전도 할 수 있고 차도 있으니 그 꿈을 실행시킬 때가 되었다. 중고 캠핑용품 매장에서 DOD 원터치 텐트도 장만했다.

토요일 새벽, 일찌감치 카셰어링 포인트에 가서 차를 집 앞으로 가지고 왔다. 트렁크에 텐트부터 각종 캠핑 장비, 그리고 옷가지와 이불 등을 가득 실었다. 초보일수록 짐이 많은 법이다. 1박 2일 여행인데 이사 간다고 해도 될 정도로 짐이 한가득.
우리의 첫 캠핑 행선지는 야마나시현(山梨県). 도쿄에서 2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야마나시현은 산지가 많아 캠핑장이 많이 몰려 있다. 더욱이 후지산을 바라보며 캠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전에 홈페이지로 캠핑장 예약을 해두었다.
캠핑이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계곡에 놀러 갔을 때와 현역 군인 시절 야외 숙영훈련 해본 게 전부. 텐트 치는 법 조차도 몰랐다. 오기 전에 유튜브로 설영법을 확인했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텐트를 설치하려고 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접었다 펼쳤다 했는지.
머릿속에는 텐트를 치고 의자에 앉아 후지산을 바라보며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땅꺼미가 지고 있었다. 후지산은커녕, 가지고 온 랜턴을 켜야 제대로 시야가 확보되는 상황.
우여곡절 끝에 텐트 설치를 마쳤다. 이게 끝인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장작에 불이 붙지 않는다. 캔들용 라이터 하나만 가지고 나무에 직접 불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가 습기를 머금었는지 연기만 스멀스멀 날뿐 불똥도 튀지 않았다.
한참을 시름하고 있을 때 옆에서 캠핑을 즐기고 있던 일본인 아저씨가 와서 토치로 불을 지펴주었다. 우리가 안쓰러웠나 보다. 그걸로 백날해도 안돼요. 짧은 한마디 남기고 밤새 활활 탈 정도로 강한 화력을 선물하고 떠났다. 덕분에 고기도 굽고 불멍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맥주도 한 모금.
익숙지 않은 초행길 운전과 캠핑 준비로 진땀을 뺀 탓에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집으로 떠나기 전 캠핑장 주변을 산책했다. 그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보였다. 바로 후지산(富士山)이었다. 두 시간 떨어진 도쿄에서도 날이 맑은 날 보일 정도인데 야마나시에서 바라보는 그 웅장함이란.

풀어놨던 짐들을 다시 차에 싣고 떠나는 길. 근처에서 온천을 하며 피로(여독)를 풀고 새로운 한 주에 대한 각오도 세운다. 장소에 따라 후지산을 바라보며 노천 온천을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자연의 신비에 경이로움을 감출 수가 없다.
이날 이후 한 달에도 몇 번이고 주말이면 캠핑을 떠났다. 일상에서 오는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대자연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즐기는 여유. 그리고 따뜻한 온천. 캠핑의 매력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