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표를 냈었다. 퇴사의 역사

나는 지금으로부터 2년전 사표를 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번째 회사에 사표를 낸 것이다. 현재까지 4번의 사표를, 그리고 5번째 회사에 재직하고 있다. 사표(辞表)라는 것은 이래저래 부정적인 뉘앙스를 띄는 것이 사실인데, 그 조직에서 무언가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뒷일이 정해져 있지 않는 사표는 다양한 퇴사 사유 중 (아마도) 최악으로 뽑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짓을 2번이나 했다. (현재는 5번째 회사 재직 중)

가장 최근에 작성했던 이력서. 첫번째 이력은 쓰지도 못하겠고. 이제 전직 이력은 그만 추가하고 싶다…

첫번째 회사는 한국에서인데 가장 아쉬우면서도 가장 빠른 시간안에 퇴사한 곳이다. 섬유 원단을 생산하는 P사. 1962년에 설립한 코스피 상장사로 시가총액 916억원의 중견기업이다. 3차례 면접과 2명의 보증인까지 세워 힘들게 들어가기도 했지만 일도 맞지 않았다. 해외영업 일본담당으로 들어갔는데 매일 영어로만 거래처를 대응해야 했고, 군대식 조직문화가 (군대를 다녀 왔으면서도)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일을 너무도 (사실 당연히) 못했기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이 강했다. 매일 막차를 타고 퇴근 하기를 연거푸. 이렇게 살다가는 금새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래서 수습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도망 나왔다.

6개월의 재충전을 거친 후 이번에는 꿈에도 그리던(!) 일본에서 다시 스타트를 했다. 두번째 회사는 도쿄 한인타운인 신오쿠보에 한국식품매장과 식당을 운영하였고 다양한 한국 중소기업의 일본진출을 돕는 일(컨설팅) 또한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후자의 업무를 하는 팀에 소속 되었다. 이곳에서 참 값진 경험을 했다. 정말 좋은 팀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야근, 주말도 일 하는게 오히려 즐거웠다. 그러나 사내 조직개편으로 팀이 두갈래로 갈라졌고 그로 인한 팀원들의 이탈. 나도 결국 이탈 하고야 말았다.

일본 편의점에서 한국 상품 시식 판촉회를 진행했었다.
일본 편의점에서 한국상품 시식 판촉을 하던 모습.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재밌었고 내가 일본에 있는 의미가 되어 주었다.

세번째 회사는 앞선 두번째 회사에서의 팀 멤버 일부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서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 사업. 즉 ‘기업(起業)’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하던 일은 두번째 회사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정부 관련 기관들로 부터 사업을 수주 받아 한국 중소기업들의 일본진출을 서포트 하는 일을 했다. 나는 그 중 온라인(EC)을 통한 진출을 맡았고 이때 본격적으로 라쿠텐(楽天)을 운영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최대 200여개 이상의 기업을 담당해야 하는 지나친 사업 목표. 설립멤버들과의 향후 회사 방향성에 대한 고민 끝에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네번째 회사는 반년가량 머문 곳이다. 내가 경험한 회사 중 가장 복리후생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사장님의 경영 마인드나 상품을 보는 눈은 가희 최고였다. 한편, 한국계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속한 영업부에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본인. 그리고 그동안과는 달리 하루 하루의 실적이 중요한 지표가 되는 곳이었다. 나는 영업부로 들어오는 거래처들의 발주서를 체크하여 출하지시를 하였고 그와 관련된 재고관리 및 청구업무를 맡았다. 덕분에 일본어는 정말 많이 늘었다. 말그대로 서바이벌. 하지만 8,000여개에 이르는 방대한 SKU와 수백곳의 거래처. 그에 대한 데이터 관리와 칼 같이 찾아오는 납기마감시간에 쫓기게 되며 첫번째 회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매일 매일 늦은 시간까지 일하게 만들었다. 점점 쌓여가는 피로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졌고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잠시 휴식(도피였을까?)을 가지고 지인 소개로 시작하게 된 5번째 회사. 이번달로 재직 1년째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EC사이트와 출하관리 등을 맡고 있다.

라쿠텐 슈퍼세일 출하 할 물건 모습
최대 반값 이상 할인행사인 라쿠텐 슈퍼세일(楽天スーパーSALE) 출하 물량 모습. 평소의 5배 이상 주문이 폭주한다.

총 5번의 회사를 거쳐오는 동안 순탄치 않은 과정들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어 준 것 같다. 각 회사를 나오며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회사: 상장을 한 중견(또는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 또는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점
두번째 회사: 팀의 비전과 조직의 비전은 같은 방향을 향해 가야한다는 점
세번째 회사: 모든 업(業)에는 전문성과 자율성이 필요하다는 점
네번째 회사: 숫자를 통해 전체(흐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지금 다섯번째 회사에서는 위 첫번째에서 네번째까지 회사에서의 경험이 토대가 되고 다시금 좋은 멤버들을 만나 정성적으로나 정량적인 성과로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기업(起業)에 대한 열망이 강해지고 있다. 언제가 그 출발선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곧 올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무언가 정말 일을(!) 낼 것 같다. (그전에 자본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떠나는 전철과 사표는 같은 의미 일 것이다
비오는 날. 나홀로, 지나가는 전철을 찍는 (약간) 철도 오타쿠.

다섯번의 회사를 거쳐온 것은 결국 어느 목표지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역, 두번째역, 세번째역, 네번째역 모두가 내가 내려야 할 역이 아니었기에 지금 다섯번째역을 향해 가고 있다. 각 역들을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는 저마다 다른 풍경이 있었고 그것이 나의 추억이자 삶의 일부가 되어 준 것이다.

사표란, 퇴직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급행(急行)를 탔으면 목적지에 더 빨리 도달했겠지만 각역(各駅)열차를 탔다고 하더라도 향하는 곳은 같다. 단지 속도의 차이일뿐. 따라서 퇴직 회수보다 퇴직 이전까지의 경험을 어떻게 살려 다음을 맞이할 것인지 준비하는 자세와 명확한 목표를 갖는다면 사표는 KTX급의 특급열차 티켓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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