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달 해외에서 보내기’

2024년 접어 들며 와이프와 세운 새로운 인생 목표다. 10년간의 일본생활과 2달간의 동남아 여행이 준 여운과 교훈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행이란 으레 3박 4일 정도의 짧은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는 남들 다 해보는 것만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애초에 여행은 왜 필요한 걸까. 김영하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행위가 여행인 것이다. 상처로 부터 온전히 분리되기에 4일이라는 시간은 역시 짧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전세계 적으로 침투 되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서 회사로 향하던 길. 집에서 벗어나 ‘회사’라는 공간으로 떠나는 여행이 있었다. 출퇴근길 전쟁에서는 해방 되었지만 여기가 집인지 회사인지 그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에 갖혀 있는 것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멀미가 생긴 것이다.

그러자 일과 휴식을 겸하는 워케이션(Workation)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전국, 전세계 어디에서나 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업무시간에는 일을 하고 그 외 시간에는 낯선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기도 한다. 시간과 비용이 허락한다면 1주일, 1달 혹은 그 이상도 될 수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시공간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이커머스가 메인인 점도 한 몫 한다. 상품을 찾기 위해 매일 같이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홍콩,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등 여러나라를 마우스로 오간다. 이 중 동남아 사이트를 방문할때면 풀(Pool)에서 더위를 식히며 여유를 만끽하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는 인도네시아 발리, 태국 방콕을 갈 때 경유지로 거쳐 갔던 곳이다. 그래서 상공에서 내려다본 모습과 공항내부를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호기심이 생겼다. 다음 여행때는 말레이시아를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따금씩 유튜브로 말레이시아 여행기를 보기도 했다. 다민족 국가 다운 다양한 음식들과 시원한 풀장이 딸린 호텔까지. 설레임을 주기에 충분했다.

올 봄 무렵부터 말레이시아에서만 구할 수 있거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호기심이 커졌다. 하지만 마우스 클릭만으로 접할 수 있는 세계는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직접 가보는 방법이 있다. 노트북이 있고 인터넷만 되면 전세계 어디에서든지 일 할 수 있다. 그렇게 와이프와 새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말레이시아 여정을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약 6시간 30분. 대략 1년전 밟았던 공항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공항에서 잠시 체류하다 바로 출국했지만 이번에는 여권에 말레이시아 입국 도장을 받고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급행열차 KLIA를 타고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이동하며 바라본 쿠알라룸푸르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하면서 또 낯설었다. 야자수 나무로 우거진 숲과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지나자 빌딩숲이 가득한 쿠알라룸푸르 시내가 모습을 보였다. 열차에서 내리니 습하고 더운 날씨가 반겨준다.

맨 처음 맞이한 쿠알라룸푸르 시내 모습
맨 처음 맞이한 쿠알라룸푸르 시내 모습

도로는 일본산 자동차가 한가득이다. 그 위로는 모노레일이 지나간다. 곳곳에 일본발 또는 현지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에어컨을 풀가동 시켰다. 간단히 준비를 하고 숙소 4층에 위치한 인피니티풀로 내려가 더위를 식혔다. 오랜만에 수경도 끼고 풀장 이곳에서 저곳까지 열심히 헤엄쳐본다. 배형하며 하늘도 올려다본다. 풀장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말레이시아에 있음을 실감한다.

여유를 즐겼으니 이제 일을 해야지. 다행히 숙소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카페 와이파이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한국에 비한다면 느리기는 하지만 일을 못할 수준은 아니다. 적어도 일본에서처럼 간헐적으로 인터넷이 끊기는 현상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숙소에서 일하다가 따분하다 싶으면 도보로 10여분 이내에 있는 카페로 이동한다. 실내는 대체로 춥기 때문에 아이스커피보다 뜨거운 커피가 생각난다. 커피한잔을 하며 와이파이를 켜고 워크모드로 전환한다. 평일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일부 관광객 손님을 제외하면 대체로 한산해서 크게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중해서 일 처리하고 근처에 있는 쇼핑센터로 시장조사를 떠난다.

이번 여정동안 거의 매일 같이 파빌리온(Pavilon)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7층까지 쇼핑몰로 구성되어 있고 500여곳의 매장이 입점해 있다. 규모가 있어 하루안에 다 보는 것은 무리다. 대부분 매장에서 영어 응대가 가능하다. 때마침 주문 받은 상품들도 이곳에 입점한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다 배가 고프거나 하면 다른 층에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가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일본 브랜드도 쉽게 볼 수 있다. KLIA를 타고 시내로 이동할때 미츠이 아울렛 간판도 보였다. 파빌리온 근처에는 유니클로 매장이 있고 돈키호테, 이세탄도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동남아 여행을 하며 유독 일본 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그에 비해 한국 브랜드는 삼전 갤럭시 외에 이따금씩 현대 자동차가 보이는 정도였다. 일본이 쉽게 침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숨어 있는건 아닐까.

장시간의 희노애락이 누적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땅을 밟게 되면 모든 것들이 새로워진다. 당장에 수질부터 낯설다. 음식도 다르고 언어도, 심지어 공기마저 다르다. 그래서 일을 하는 동안은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매일 같이 봐오던 세상이 모니터 속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우스 클릭 몇 번 하는 동안 시간은 아침9시에서 금새 오후 6시가 된다. 문득 창밖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쿠알라룸푸르임을 새삼 자각한다.

이번 말레이시아 여정동안 특별히 ‘관광’이라고 할만한 건 하지 않았다. 일 → 식사 / 휴식 → 일 / 시장조사 → 식사/휴식의 반복이었다. 처음부터 ‘워케이션’을 작정하고 떠났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간 좇겨가며 하는 투어보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일상이 주는 매력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타지에서의 시간은 배(倍)의 수로 움직인다. 눈 깜짝할 사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년초 목표 중 1/4는 달성했다. 말레이시아 이후로 일본도 일주일 정도 다녀왔으니 2/4는 달성했다. 올해가 가기전 얼추 100%는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어디를 가야겠다는 특별한 계획은 없다. 다만 그때를 대비해 계속 영어의 끈은 놓지 않고 있는 중이다. 처음가는 이국만큼이나 영어가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이번 쿠알라룸푸르에서도 그랬고 영어를 쓰다보니 조금씩 늘고 있는게 느껴진다. 올해 마지막 여행지에서 어떤 영어 멘트가 내 입에서 나오게 될까. 다음 웨케이션이 기다려지는 가장 큰 이유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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