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초의 도쿄는 무척 더웠다. 큰 이민가방과 백팩을 메고 공항에서 쉐어하우스로 향했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 미리 프린트해 온 지하철 노선표와 지도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정표에는 한자, 영어, 한글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집주인과의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국 지하철보다 조용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곳이 일본이라는 자각은 아직 하지 못했다.
도쿄 쉐어하우스에 입주하다

몇 차례 열차를 갈아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려 도쿄 메트로 한조몬선(半蔵門線) 스미요시역(住吉駅)에 내렸다. 역에서 나와 로손 편의점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서 3번째 건물을 지나칠 즈음 길목 안쪽으로 3층짜리 철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쉐어라 스미요시’. 사전에 홈페이지로 봤던 외관 그대로의 건물이 눈앞에 있다. 원래 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쉐어하우스로 쓰는 곳이다. 집주인과 만나기로 한 1층문을 열었다. 사무실 출입 문짝 같은 갈색빛 문을 여니 스카이프로 미리 만났던 타가상이 있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쭈뼛쭈뼛 턱수염을 기른 40대 남성. 일본 드라마에서 보던 일본 남자 느낌이다. 친절하게도 내가 해상으로 미리 보냈던 국제 택배 부재중 쪽지를 확인하고 입주 날짜에 재배달 요청을 해두었다. 일본은 택배 배달 일자, 시간 지정이 가능하다. (이때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건물소개와 생활요령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받았다. 각 층에는 샤워실과 건식 화장실, 그리고 주방이 있었다. 2층에는 코인 세탁기도 2대 설치되어 있었다. 공동 거실은 없어 드라마 라스트 프렌즈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아무렴 어때.
1층에는 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거주하는 남성 전용 플로어였다. 한 명은 나이지리아, 또 한 명은 브라질계 일본인. 2층과 3층에도 각 6개실씩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전부 개실(個室)로 되어 있어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내 방에는 큰 책상 하나와 매트가 없는 싱글 사이즈 목조 침대, 그리고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이민가방과 EMS로 온 짐을 풀어서 정리를 시작했다. 낯선 공간에 짐을 푸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다. 이사는 곧 새 출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짐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이곳에 오게 되기까지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난데없이 찾아온 일본어 트라우마, 선배형의 일본 워킹홀리데이 선언, 해외인턴제도가 나를 이곳, 도쿄로 이끌었다. 가슴속 한편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언젠가는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불과 반년만에 이루어졌다.
(※2025년 현재, 정보가 안나오는 걸로 봐서는 운영을 안하는 듯 하다.)
(※2025년 현재 정보가 안나오는걸로 봐서는 영업을 안하는 듯 하다.)
도쿄 첫끼는 스키야에서 덮밥으로
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지갑을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스카이트리를 등지고 큰 도로를 따라 걸어보았다. 교차로에는 초밥 도시락을 파는 치요다 스시(ちよだ鮨)가 있었다. 하지만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니 패스.

인도를 따라 걸어본다. 중화요리, 야끼니꾸, 라멘 가게가 줄지어 있다. 가격을 보니 돈이 넉넉치 않은 외국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선택지들이다.
그러다 큼직한 빨간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스키야(すき家)라는 곳이다. 일본 소고기 덮밥, 규동 체인 중 한 곳. 아직 물가가 오르기 전이라 한 그릇에 300엔대로 비교적 저렴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석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펼쳐본다. 규동, 부타동, 카레 라이스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다. 든든하게 먹고 싶어 부타동에 미소시루(된장국) 세트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한 장 더 넘기자 아사히 병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생했으니까 맥주 한잔 마실까? 아니야, 맥주를 마시면 예산 초과야. 천사와 악마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격전을 벌인다.
“비루 잇뽕 쿠다사이(맥주 한 병 주세요!)”
대결은 악마의 승으로 끝났다. 일본행 첫날,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한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밥공기를 들고 젓가락으로 고기와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다음 칼칼한 맥주로 목을 축인다. 반찬이라고는 베니쇼가(紅生姜. 빨간색 초절임 생강) 하나뿐이지만 아쉬움 없는 만찬.

맥주 한 모금에 이렇게 취기가 올라온 적이 있었을까. 손님이 올 때마다 종업원들이 외쳐대는 ‘이랏샤이마세’만이 고요한 정적을 깼다. 벽에 붙은 신메뉴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밥과 맥주를 번갈아 넘겼다.
문득 10년 전 일본 홈스테이에 참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어 인사말 밖에 몰랐던 고등학생 시절. 나를 맞이한 아주머니가 내준 카레라이스가 첫끼였다. 그날의 감동이 나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일본말을 할 줄 안다. 이렇게 맥주도 주문하고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덮밥과 국, 그리고 맥주 한 병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스카이트리에는 야간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동네 산책을 해본다. 도쿄 23 구라고는 해도 고즈넉하다. 이미 불이 꺼진 상점들도 하나둘 보인다.

도쿄에 도착한 첫날, 그렇게 무작정 거리를 거닐다 아직 낯선 향기가 감도는 쉐어하우스로 돌아왔다. 샤워 후 한국에서 챙겨 온 얇은 이불과 베개를 펼쳤다. 어색함도 잠시. 하루의 긴장감이 스르르 녹듯이 사라지며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