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한때는 무척이나 갖고 싶었던 그 자리를,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천번, 만번 생각해 본다. 이게 정말 최선일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 2013년 첫 직장을 시작으로 2022년 창업하기까지 총 6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 군대와 한국, 일본 회사를 거치며 조직생활 속에서 반복되는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을 돌아봤다.
- 10년의 회사 생활을 마치고 창업 4년 차가 된 지금, 그 시간을 다시 기록해 본다.
취업과 동시에 퇴사하다
2013년 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2022년 창업을 결심하기까지 총 6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한 회사당 평균 1년 6개월이다. 가장 짧았던 건 첫 회사 3개월, 그다음은 네번째 회사 6개월. 처음부터 짧게 다닐 생각으로 입사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대학 졸업하고 반년 간 취준생 시기를 보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쓰기 위한 스펙 만들기를 시작했다. 토익, 자격증 공부, 일본어 연습 등. 오후에는 면접 연습을 했다. 지방이라 스터디도 없어 나 홀로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영상을 촬영했다.
‘말이 너무 빨라…’
‘표현이 두리뭉실해…’
‘시선처리가 부산스러워…’
나 홀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목표로 했던 토익 800점대를 달성하고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서류합격 하는 확률이 늘어났다.
그러다 면접 기회를 얻게 된 P사. 지금이야 코스피 상장사에 유서 깊은 회사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주식에 관심도 없었고. 그저 실전 연습한다는 기분으로 갔다. 그런데 덜컥 합격해 버릴 줄이야!
입사 전에 건강검진 진단서와 보증인 서류까지 제출해서 입사 통지서를 받았다. 큰 회사라 다른가보다 했다. 어찌 되었건 한번 들어간 이상 뼈를 묻을 각오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게다가 그렇게도 원하던 해외영업직이었으니까.

그런데 3개월만에 도망치듯 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정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18층에 위치한 사무실. 주변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통창문이 있었지만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어둠이 찾아와 퇴근하기를 바랄 뿐.
상사한테 신나게 깨지고 나 홀로 1층으로 내려 가고는 했다. 담배를 안 피니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렸을까. 일머리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상사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가만 있자, 이 감정… 어디서 느껴본 것 같은데.(!)
사회 부적응의 시작은 군대에서
군대였다. 22살 가을에 입대한 육군. 이미 또래들은 상병 이상이거나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맞고참은 20살. 사회에서는 형, 또는 선배라고 깍듯하게 말했을 후배한테 존댓말을 해야 했다. 늦게 간 게 잘못이다. 괜찮다,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시련이 닥친 것은 행정병으로 차출되면서부터다.
본부 행정병. 군대 가기 전에는 행정병이면 군 생활 편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들 훈련할 때 컴퓨터 만지니까. 그런데 말이지. 세상 쉬운 일이 없다. 행정병에게는 직속상관이 존재한다. OO 중위. 30대 초~중반 정도에 건장한 체격.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와 동그란 안경 속 초승달 모양의 눈. 늘 웃상이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환상은 동갑내기 사수가 전역하면서부터 깨져버렸다. 그러니까 백일 휴가 전부터였을까. 아직 군 생활이 익숙지 않아 이런저런 실수들이 있었다. OO중위는 내 실수에 쉽게 흥분했다. 웃는 얼굴은 금세 180도 역전해 사악한 악마처럼 변했다. 거기에 지독한 워커 홀릭. 매일 같이 야근했다. 첫 휴가 복귀날도 예외는 없었다. 보통의 병사가 밤 10시에 취침한다면 나는 12시가 다 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싫어도 싫다고 할 수 없는 게 군대다.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했다. 매일같이 상관에게 시달리고 같은 내무반 전우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약 1년 가까이 이런 생활이 이어졌다. 정신병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지. 그러다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OO중위가 마음대로 대체 인력을 착출 했다. 이때다 싶어 원래 보직인 통신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행히 복귀가 결정되었다.

이후의 군생활은 오히려 순탄했다. 컴퓨터보다 몸으로 하는 일이 늘어났지만 행복했다. 땀 흘리고 나면 끝났다. 다른 전우들과도 친해졌다. 어느덧 상병을 넘어 군생활도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OO중위는 정신 질환으로 의병전역했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의 전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 주임원사에 의해 행정반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군생활의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조직은 어디
그랬다. 나는 상명하복이 강한 조직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군대도 그렇고 첫 회사에서도 상사의 권위에 짓눌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 한잔 마시고 훌훌 털어내 버리는 대담한 성격이라면 달랐으려나. 군대는 벗어날 수 없지만 회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는 인턴생으로 시작했다. 팀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의 정직원과 일본인 아르바이트 1명, 그리고 인턴 6명 구성이었다. 조직이다 보니 부장, 차장, 과장 등 직급은 있었지만 강압적인 상명하복의 문화는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적응도 1달 만에 했고 특기였던 홈페이지 만들기를 살려 회사 홍보 사이트도 구축했다. 사내 주말모임에도 참석했고 팀에 녹아들었다.
그 결과 인턴생 최초로 정사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렇게 10년간의 일본생활이 시작되었다. 20대의 젊은 패기까지 더해져 이때처럼 일 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적도 없다. 이 흐름대로라면 이곳이 인생 마지막 직장이 될 게 분명했다. 정사원이 되고 정확히 1년간은 그랬다.

그러나 임원진의 조직개편안에 반기를 들었던 부장님이 결국 회사를 떠났다. 뒤이어 과장님 한 분도 떠났다. 남아있던 팀은 사실상 둘로 나뉘었다. 예전 같은 생동감이나 전우애 같은 건 사라졌다. 이때부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계속 남아 있는 게 맞는 걸까. 함께 했던 사람들이 좋아 이 회사에 남기로 결정했었는데, 그들이 없다면 어떤 동기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안고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국으로 돌아갔던 부장님이 독립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마치 웹툰 미생 오상식 과장이 온길 인터내셔널을 설립했던 것처럼. 물론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왔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전 직장 멤버 4명이 모여 다시 힘을 맞대고 일을 시작했다. 다시 퍼즐조각들이 맞추어져 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사이 나도 머리가 컸다. 사회 초년생에서 5년 차로 접어들었다.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었고 후배 팀원들도 관리했다. 직책도 팀장. 이전보다 목소리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시키는 일만 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사장님(전 부장님)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내 생각이 맞지 않았다. 여러 제안도 해보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답답했다. 안정과 도전은 양립할 수 없나 보다. 아직 30대 초반이었고 다른 일이 하고 싶어졌다. 결국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3번째 회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직종의 4번째 회사로 이직(전직)을 감행했다.
그 후 5년간 다시 2번의 이직을 했다. 4번째 회사에서는 매일 같이 쏟아지는 업무량과 부족한 일본어 탓에 업무가 진척되지 않았고 사장님의 훈계가 이어졌다. 그렇게 반년만에 포기. 5번째 회사는 한국계 회사 특유의 서열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회장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일이 진행되다가도 회장님의 마음이 변하면 모든 판을 새로짜야 했다.
마지막 회사는 온전한 일본 회사. 일본인 사장님에 직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입사 2년 만에 임원급으로 승진한 케이스도 있다며 열린 조직임을 자랑했던, 인사팀의 말에 입사를 결심했다. 다시 평사원부터 시작했지만 임원까지 올라갈 기세로 실적을 내보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성과가 나왔고 1년 만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이번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데자뷰처럼 조직개편이 모든 운명을 뒤바꿨다. 팀 총괄 임원이 변경되었고 평가 기준도 바뀌었다. 현실적으로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KPI)를 제시했다. 마케팅 예산 사용도 대다수 반려되었다. 당연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급여동결에 상여 삭감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들이 이어졌다. 6번째 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다.
창업에 길에 들어서다.
더 이상 조직에 흔들려 일을 그르치는 일 없이 역량을 펼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창업을 결심했다. 창업 후 첫 고객은 6개월만에 퇴사했던 4번째 회사였고 OB멤버들과 만들었던 회사도 주요 고객이다. 회사는 떠났지만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한 결실이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4년째 창업자의 길에 서있다.
회사를 다닐 때만큼의 안정감은 없다. 직원 없이 와이프와 원팀으로 일하고 있다. 일은 물론 현금흐름도 챙겨야 한다. 한숨도 늘었다. 예전에는 상사에게 혼나거나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매출, 상환 등 경영에 관한 것들 때문이다.
그럼 창업한 걸 후회하냐고? 아니. 더 늦기 전에 독립의 길로 들어서길 잘한 것 같다. 어차피 맞을 매, 미리 맞는다고 생각하지 뭐. 요즘 반도체 회사들은 상여로 억씩 받아간다는 뉴스가 자주 나온다. 솔직히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린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회사 다녔다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을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괜찮다.

나는 회사에서 영원할 수 있었을까.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기에 눌려 스트레스받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조직 부적응자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환경이 창업이었나 보다. 그래, 아직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이 여기에 숨어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