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한달살기’키워드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막혀 있던 하늘길이 열리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에너지가 강하게 분출되었다. 여행유튜버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 등을 통해 대리만족했던 해외여행을, 이제는 직접 해보리라 마음 먹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기에 재택근무 확산도 한 몫 했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인터넷만 된다면 전세계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집에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굴레를 벗어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라이프 스타일이 된 것이다.
해외여행 해야 하는 이유
2023년 4월 11일, 두번째 발리행길에 올랐다. 첫번째는 이보다 세 달전인 1월 20일경으로 4박 5일 일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일본에서 프리랜서였던 나와 회사를 다니고 있던 와이프. 때마침 우리나라 구정연휴에 들어갔고 한국과 거래가 많았던 와이프 회사도 업무에 여유가 생겼다. 겸사겸사 연차를 포함해서 밀려있던 휴가를 소화하기로 하고 발리행을 택했다.
숙소는 발리 우붓에 잡았다.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도 풀고 힐링하고자 조금 비싼 곳으로 했다. 마치 동화속 왕궁 침실처럼 새하얀 캐노피가 넓직한 침대 위에서 은은하게 감싸 내려온다.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넉넉한 크기의 석재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입욕제를 풀고 있으니 없던 피로마저 풀린다. 매일 조식은 초록빛 정원 안쪽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열대 숲이 바라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다. 주스, 커피, 과일에서부터 메인 요리까지 상냥한 미소를 띈 직원들이 우리의 식사 속도에 맞추어 가져다 준다. 늘 을(乙)의 자세로 사람을 상대해야 했던 우리에게 이곳에서 받았던 서비스는 감동 그자체였다.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얼마전까지도 공항 인근 사누르 비치에 들러 잔잔한 파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와이프는 큰 결심을 한다. 바로 ‘퇴사’를 결정한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매일 밤 늦은시간까지 이어지는 철야업무와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술을 마셔도 갖고 싶던 것을 사도 드라이브를 다녀와도 마음이 풀리는건 잠시뿐이었다. 늘 공허했고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발리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이 그녀를 어루만져 주었다. 달래주었고 이해해주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온 한 편집 영상속 강연자(아마 교수였던 것 같다)는 이런 말을 했다. “경험 쌓겠다고 돈 들여서 해외여행 가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는 땀 흘려가며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돈 들여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반박한다. 돈 들여서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과연 나와 와이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당연히 No다. 여행이 생각의 전환 속도를 더욱 앞당겨 주었다. 큰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를 바꾸어 놓았다.
한달살기 해야 하는 이유
와이프 퇴사 일주일 후, 생각의 전환점을 안겨준 발리로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4박 5일이 아니다. 출근해야 할 회사가 없으니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첫 목표는 한달살기였다. 발리에 다시 도착한 4월 12일 아침 풍경은 잊을 수 없다. 3달전 시간에 쫓기며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모습들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강하게 느꼈다. 신선하고 새로웠다. 마치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처음 봤을때 보이지 않던 복선이 읽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빠당바이에서 하루를 묵은 후 쾌속보트를 타고 롬복섬에 있는 길리T로 이동해 그곳에서 1주일, 다시 발리섬으로 돌아와 우붓에서 1주일, 꾸따에서 1주일 해서 총 3주를 보냈다. 원래는 한달을 꽉 채울 생각이었지만 굳이 ‘한달’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발리가 어떤 곳인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느끼고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체없이 짐을 싸서 다음 행선지인 태국, 방콕으로 향했다.
방콕은 발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경유하면서 지나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도 그러하겠지만 정말 큰 대도시였다. 왜 동남아를 ‘못사는’ 나라라고만 생각했을까. 어쩌면 서울보다, 도쿄보다 화려한 도시인지도 모른다. 지하철과 모노레일로 수도권내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도심에는 드높은 고층빌딩과 화려한 상업시설도 가득하다. 수상버스를 타고 가던 아아콘시암은 한일 양국에서 보았던 왠만한 상업시설 이상으로 화려했고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방콕에서 1주일을 보낸 뒤 비행기를 타고 태국 북부도시인 치앙마이로 이동했다. 화려했던 방콕과는 달리 고즈넉한 정취가 물씬 풍기는 지역이다. 높은 건물도 없고 교통편도 부족하다. 날은 덥고 예고 없이 내리는 국지성 호우에 습하디 습한 기온 탓에 몸살도 났다. 하지만 그런 불편들을 견디며 지내다보니 이곳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붉은색 성벽으로 둘러 쌓인 치앙마이 중심부 올드타운과 그 밖에 위치한 뉴타운. 우리는 보름동안 이곳들을 번갈아가며 치앙마이를 체험했다. 이후 방콕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짧은 여행도 매력 있다. 하지만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서 나온 인기 스팟 위주로 둘러보고 나면 일정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한달, 혹은 그 이상의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을 잘못들어도 시간에 허덕이지 않는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 하루에 끝내야 할 코스를 수일에 걸쳐서 가거나 여러번 가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에게 맞지 않는 곳임을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면 또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면 된다.
한달살기를 하면서 지출도 컸다. 못해도 매월 한사람 급여분만큼은 고스란히 여행경비로 들어갔다. 여행경비 외에도 기존 집세 등 부가적인 비용도 필요하다. 만약 돌아갈 직장이 없다면 일자리를 다시 구해야 한다. 다만, 이 모든 리스크들을 감내할만큼 해외 한달살기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낯선 곳에서 한달살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10년이나 해 온 일본생활을 정리할 용기가 났을까? 창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이 글도 쓸 수 없었다. 기다려도 경험할 수 없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경험하자. 한달살기를 하면서 무수한 생각의 점들이 뿌려진다. 그리고 이 점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난 언제 한 번 한달살기 해볼 수 있으려나 ㅎㅎ “그에 비해 한달, 혹은 그 이상의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을 잘못들어도 시간에 허덕이지 않는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 이 부분이 참 좋다요.
밤 늦게 쓰다보니 글이 좀 감성적으로 변했네요 한달살기… 맘만 먹고 바로 준비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빨리 시즌2 하고 싶어져요. 거기서 찍었던 영상들보니 그 당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겠더라구요.